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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더 브레인 : 삶에서 뇌는 얼마나 중요한가 / 리뷰(3)

by 크레센또 2026. 7. 28.

 

더 브레인 /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 전대호 옮김


목차

  1. 나는 누구인가?
  2. 실재란 무엇인가?
  3. 누가 통제권을 쥐고 있을까?
  4. 나는 어떻게 결정할까?
  5. 나는 네가 필요할까?
  6. 미래에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까?

5. 나는 네가 필요할까?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의 윌슨을 아시나요? 주인공 척 놀랜드가 출장 중 타고 있던 비행기가 어느 바다 위에 추락합니다. 놀랜드는 구명보트에 의지하다 정신을 잃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가 떠밀려간 곳은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무인도였고 놀랜드는 무려 4년 동안 그곳에서 홀로 지냅니다. 무인도 생활에 적응하던 중 손을 다친 놀랜드는 분하고 짜증이 났는지 함께 떠밀려 온 택배 중 하나인 배구공을 다친 손으로 잡고 던집니다. 그렇게 그의 유일한 친구 윌슨이 탄생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뗏목을 타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폭풍을 만난 후 윌슨을 떠나보내면서 놀랜드는 결굴 오열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또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 윌슨을 배구공 그 이상의 존재로 보고 있지는 않으셨던가요? 그건 아마 우리가 사물이나 자연에 인격과 스토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파악하고 관계 맺으면서 살아왔던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프리츠 하이더와 마리안느 짐멜의 도형 영화(1944)

https://youtu.be/40FepU0lu2A?si=YUlpyXq8NPifA_G3

 

 도형 영화 (혹은 '하나의 사회적 이야기') 

  단순한 도형 두 개(삼각형과 원)가 만나서 함께 원을 그리며 돈다. 잠시 후, 더 큰 삼각형 하나가 몰래 등장한다. 그 삼각형이 작은 삼각형을 밀쳐낸다. 원은 천천히 물러나 사각형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그러는 사이에 큰 삼각형은 작은 삼각형을 멀리까지 추격한다. 이어서 큰 삼각형은 사각형 구조물 의문에 위협적으로 다가간다. 그 삼각형은 우격다짐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원은 필사적으로 다른 탈출구를 찾지만 소용이 없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바로 그 순간, 작은 삼각형이 돌아온다. 그가 문을 열고, 원은 황급히 뛰어나와 그와 만난다. 둘은 문을 잠가 큰 삼각형을 가둔다. 감금된 큰 삼각형은 사각형 구조물의 벽을 들이받는다. 밖에서는 작은 삼각형과 원이 함께 빙글빙글 돈다.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냥 단순한 도형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는 대답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내내 원 하나와 삼각형 두 개가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 싸움, 추격, 승리를 이야기했다. 하이더와 짐멜은 우리가 주위의 모든 것에서 얼마나 쉽게 사회적 의도를 지각하는지 보여주려고 이 애니메이션을 활용했다. 우리 눈에 포착되는 것은 도형들의 운동이지만, 우리는 의미와 동기와 감정을 - 하나의 사회적 이야기의 형태로 - 본다. 우리는 이야기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새들의 싸움, 별들의 운동, 나무들의 흔들림을 보았고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지었으며 그것들이 의도를 가졌다고 해석했다.

 

 우리는 단지 도형일 뿐인 것들을 인격과 의도를 가진 대상으로 보고, 그것들의 움직임에 사랑, 싸움, 추격, 승리 등의 서사를 부여합니다. 새들의 움직임으로 국운을 점치던 로마의 점술관, 별자리와 관련된 스토리나 신화, 다양한 문화권에서 숲의 소리를 자연이나 정령들의 메시지로 여기던 것처럼요. 어쩌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서사나 의도,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전승하는 것은 인류가 존속을 위해 필요로 했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걸음마도, 말도 못 하는 아기들조차 세상을 '하나의 사회적 이야기 형태'로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자들인 킬리 햄린, 캐런 윈, 폴 블룸이 고안한 실험을 재현하기 위해서 나는 아기들에게 인형극을 보여주었다. 아기 들은 차례로 한 명씩 혼자서 인형극을 보았다. 그 아기들은 나이가 만으로 한 살 미만으로 이제 막 주위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인생 경험이 많지 않았다. 아기들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인형극을 보았다. 막이 열리면, 오리 한 마리가 장난감 상자를 열려고 애쓴다. 오리는 뚜껑을 잡으려 하지만 꽉 움켜쥐지 못한다. 각각 다른 색깔의 셔츠를 입은 곰 두 마리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잠시 후, 곰 한 마리가 오리를 돕는다. 오리가 상자 모서리를 붙잡고 뚜껑을 힘껏 열게 해준다, 곰과 오리가 잠깐 포옹한다. 그러나 곧이어 뚜껑이 다시 닫힌다. 이제 오리는 다시 뚜껑을 열려고 애쓴다. 지켜보던 다른 곰이 뚜껑 위에 올라앉아 오리를 방해한다.
 여기까지가 인형극의 전부다. 간결하고 대사가 없는 이 인형극에서 곰 한 마리는 오리를 도왔고 다른 한 마리는 심술을  부렸다. 막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면, 내가 곰 두 마리를 들고 아기에게 다가간다. 나는 곰들을 아기 앞에 내밀어 한 마리를 고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아기가 친절하게 행동한 곰을 고른다. 이것은 예일 대학교의 연구자들이 얻은 실험 결과와 같다. 내 실험에 참가한 아기들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타자들에 대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창이 없는 모나드

 우리에게 '미분'으로 잘 알려진 유럽 근대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서 단자론[The monadoly]에서 우리를 포함한 세상의 피조물들을 모나드(단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단자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에 모나드들은 결코 서로 직접 소통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나드의 모든 행위, 즉 술어는 이미 모나드 속에 내재되어 있고 그것들이 전개될 뿐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모나드 사이의 관계 또한 이미 서로 안에 예정된 것이 실현되면서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라고 합니다. 

 생명이란 비행기와 같아서 뇌라는 조종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알 수 없고 계기판들의 신호를 취합하여 재구성한 결과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인지생물학자 마투라나의 비유로 보았을 때, 창이 없는 모나드는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개체들은 서로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거울효과

 피험자가 예컨대 미소 짓는 얼굴이나 찡그린 얼굴 사진을 볼 때, 우리는 피험자의 얼굴 근육 운동을 알려주는 단기적인 전기 활동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 전기 활동은 대개 아주 미세했다. 이 현상은 이른바 '거울 효과'에서 비롯된다. 즉, 피험자는 자동적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자신이 보는 표정을 흉내 낸다. 미소를 보면 미소를 짓는다. 물론 피험자의 근육들은 너무 미세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미소를 시각적으로 또렷이 알아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서로를 모방한다.
 거울 효과는 신기한 사실 하나를 이해할 단서를 제공한다.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는 얼굴이 서로 닮는다는 사실 말이다. 결혼 기간이 길수록, 이 효과는 더 강하게 나타난다. 여러 연구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단지 부부가 같은 옷을 입거나 같은 머리모양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의 표정을 흉내 내다보니 주름의 패턴이 똑같아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생략)...
 보톡스를 얼굴 근육에 주사하면, 근육이 마비되어 주름이 개선된다. 그러나 이런 미용 효과 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부수효과가 하나 있다. 우리는 보톡스 사용자들에게 앞선 실험에서 사용했던 사진들을 똑같이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근전도를 측정해보니, 그들의 얼굴 근육들은 거울 효과를 더 약하게 나타냈다. 납득할 만한 결과였다. 그들의 근육들은 고의로 약화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아기가 세상을 학습하는 아주 기초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일까요? 아마 모방을 통한 학습일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의 말이나 표정, 행동을 모방을 통해 학습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익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방을 통해 배우는 것은 단지 생존기술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톡스의 효과로 얼굴 근육의 전기 활성이 떨어진 피실험자가 어떤 표정 사진을 보았을 때,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의 감정을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닌 나의 신체로부터 오는 신호를 감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증 매트릭스 그리고 공감

 누가 주삿바늘로 당신의 손을 찌른다고 상상해 보라. 그때 일어나는 통증은 뇌 속의 단일한 장소에서 처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은 여러 뇌 구역들을 활성화하고, 그 구역들 모두가 조화롭게 작동한다. 이 연결망을 일컬어 '통증 매트릭스'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다. 통증 매트릭스는 우리가 타인들과 연결되는 방식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누군가가 주삿바늘에 찔리는 모습을 당신이 보면, 당신의 통증 매트릭스의 대부분이 활성화된다. 당신이 실제로 찔렸다고 알려주는 구역들은 활성화되지 않지만, 통증에 대한 감정적 경험을 담당하는 구역들은 활성화된다. 다시 말해, 통증을 느끼는 타인을 지켜볼 때 사용되는 뉴런 장치는 스스로 통증을 느낄 때 사용되는 뉴런 장치와 동일하다. 바로 이것이 공감의 토대다.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타인의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타인의 상황에 당신 자신이 처했다면 어떠할지를 당신은 불가항력적으로 시뮬레이션한다. 영화와 소설을 비롯한 이야기들이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인류 문화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같은 우리의 시뮬레이션 능력에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매우 낯선 인물이거나 완전히 꾸며낸 캐릭터라고 해도, 당신은 그의 고통과 황홀을 경험한다. 당신은 그 주인공 속으로 녹아들어 그의 삶을 살고 그의 입장에 선다. 타인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당신은 이것이 그 사람의 사정이지 내 사정은 아니라고 당신 자신에게 말하려 애쓸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뇌 속 깊숙이 자리 잡은 뉴런들은 당신의 사정과 타인의 사정을 구분할 줄 모른다.
 이렇게 타인의 통증을 느끼는 천성적 장치는 우리가 아주 쉽게 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우리가 애당초 이 장치를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진화의 관점에서 공감은 유용한 솜씨다. 공감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더 잘 파악함으로써 타인의 다음 행동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감의 정확성은 한계가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에 투사할 뿐이다

 

 공감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와 맥락을 가지고 쓰일 수 있겠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없이는 공감이라는 것이 작동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더 브레인]의 저자도 위의 글에서 공감을 타인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라고 먼저 정의한 후 자신의 논지를 이어나갑니다. 우리의 뇌에서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 되는 통증 매트릭스는 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 활성화 되는 부위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통증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부분 중 '섬엽'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이 부위는 자신의 신체 상태에 대한 신호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느낌이나 감정의 형태로 변환하는 영역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신체를 통해 시뮬레이션하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시뮬레이션 과정을 거친 후 우리가 자신을 타인에게 투사할 때, 가엾게 여기는 동정심이나 불의에 대한 분노와 같은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이나 과학이 있기 이전, 근대의 사상가로부터 '고통의 시뮬레이션'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 데이비드 흄(1717~1776)]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몸짓에서 내가 그의 고통의 결과를 볼 때, 나의 마음은 즉시 이런 결과들로부터 그것의 원인으로 옮아가서, 그 자리에서 고통의 정념 그 자체로 전환될 정도로 생생한 고통의 관념을 형성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내가 어떤 감정의 원인을 지각할 때 나의 마음은 그것이 낳은 결과로 인도되어 비슷한 감정에 의해 자극을 받게 된다. 내가 만약 무시무시한 외과수술에 입회한다면, 수술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수술 도구를 준비하고 붕대를 정돈하며 철제 기구를 열로 소독하는 것을 볼 때, 이 모든 광경이 나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매우 강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념 그 자체가 직접 나의 마음에 느껴질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정념의 원인이나 결과를 감각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정념을 추리해 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들이 곧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은 이타적인 행동의 근원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했던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이 뇌과학자였다면 아마도 이타성을 '통증 매트릭스'에서 찾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어떤 행위가 단지 의무적으로 이루어졌거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면 그 행동을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행동이 윤리적일 수 있으려면 동정심과 같은 정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정이나 정념이라는 것에 기반을 윤리학은 감정이 가진 변덕스러움 때문에 비판에 쉽게 노출되기도 합니다. 특히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차등을 넘어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별적 공감

 앞서 언급했듯이, 타인이 통증을 느끼는 것을 보면, 관찰자 자신의 통증 매트릭스가 활성화된다. 이것이 공감의 토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토대를 바탕으로 공감에 관한 우리의 질문들을 한 단계 격상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한 변화를 가미했다. 즉, 똑같은 손들 각각에 한 단어로 된 표찰을 붙였다. 그 표찰들은 '기독교도', '유대인', '무신론자', '무슬림', '힌두교도', '사이언톨로지 교도'였다. 컴퓨터가 손 하나를 무작위로 고르자, 그 손이 스크린 중앙에 확대되어 나타나고 면봉이 그 손을 건드리거나 주삿바늘이 그 손을 찔렀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의 뇌는 외집단의 일원이 통증을 느끼는 것을 볼 때에도 내집단의 일원을 볼 때만큼 관심을 기울일까?
 우리는 상당히 큰 개인차를 발견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피험자의 뇌는 내집단의 일원이 통증을 느끼는 것을 볼 때 더 강한 공감 반응을 나타냈다. 외집단의 일원을 볼 때 나타나는 공감 반응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표찰이 고작 한 단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결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아주 적은 정보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방의 소속 집단을 확인한다.
 통증을 느끼는 타인에 대한 당신 뇌의 선의식적(의식에 선행하는) 반응은 기초적인 범주화에 의해서도 충분히 변화한다. 물론 종교의 편 가르기 경향에 대해서 여러 견해를 내놓을 수 있겠지만,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결과는 이것이다. 우리의 실험에서, 무신론자인 피험자들조차도 '무신론자라는 표찰이 붙은 손의 통증에 더 강하게 반응했다. 다른 표찰이 붙은 손을 볼 때 그들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요컨대 우리의 실험 결과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당신이 속한 집단이다. 우리의 실험 결과는 사람들이 외집단의 일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감이라는 것은 그 단어가 주는 따스한 어감만큼이나 남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공감능력 = 좋은 것', '공감능력이 없는 것 -> 사회적 지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도식화하며 살아가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차별적 공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내집단 안에서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선하다는 평판을 가진 사람조차 외집단에 속한 타인에 대해 오히려 더 무감각해지고 잔혹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공감능력은 내집단의 결속을 다지며 이타적 행위를 이루는 주요 계기 중 하나일 수는 있으나 자칫 과해진다면 공감대의 스포트 라이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한 없이 차갑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필요할까

 

 다시 영화 '캐스트 어웨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놀랜드가 무인도로 내던져졌을 때, 그곳에서의 삶은 기존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무인도라는 세계는 놀랜드가 배고픔, 두려움, 막막함, 그리움 등의 기분이나 감정을 느끼든, 어떤 사연을 가지고든,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어떠한 표정이나 반응도 보이지 않을 곳이었을 것이니까요. 이런 곳에서 그가 살아야 할 이유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그가 무인도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놀랜드는 그가 죽으려는 순간 나뭇가지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자살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놀랜드는 그때 '따듯한 담요의 느낌이 밀려왔고 왠지 모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아마 무심하다고 생각했던 대상으로부터 순간이나마 따듯한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단순한 도형들의 움직임을 보고 인격과 의도를 가진 무언가들의 사랑, 싸움, 추격, 승리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처럼, 무인도와 배구공이 인격과 표정을 가진 '너'로 다가올 때, 어쩌면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